2008년 9월 20일 볼튼-아스날 리뷰

0. 리복 스타디움 방문.

순위나 팀 분위기, 홈-어웨이와 관계 없이, 꾸준히 아스날을 괴롭히는 팀들이 여럿 있습니다. 요 몇년사이 적응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피지컬이 강한 선수들로 구성되어 미드필드에서부터 몸으로 부딪혀오는 이런 팀들에게는 유독 고전 해오곤 했죠. 특히나 원정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구요. 이번에 방문한 리복 스타디움의 주인 볼튼 원더러스가 바로 이런 팀들 중 하나입니다. 게다가 현지 시간으로 17일 챔피언스 리그 원정을 다녀온 뒤 고작 3일 쉬고 치르는 경기. 우크라이나에서도 썩좋지 않은 경기를 보여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쳐져있는 상황에서, 웽거는 미드필드에 데니우손, 에보우에, 파브레가스, 송을 배치합니다. 일단 포메이션 상으로는 데니우손과 송이 중앙을 담당하고 에보우에가 왼쪽, 파브레가스가 오른쪽을 담당하는 모양이었습니다만, 파브레가스는 우측으로 배치되어도 중앙으로 나온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파브레가스와 데니우손이 서로 자리를 바꿔가면서 플레이할 것이 예상되었습니다.


1. 홈팀의 우세.

경기 시작하자마자 일방적인 홈 관중들의 응원, 원정 3연전의 피로, 익숙치 않은 4미들의 조합, 홈팀의 우세한 피지컬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면서 경기 초반 볼튼이 아스날을 밀어붙이다가 결국은 14분 케빈 데이비스의 머리에 맞은 코너킥이 알무니아의 손과 클리쉬의 머리를 지나 골네트를 흔들고 맙니다. 놀란에게 중거리슛을 허용한 것부터 시작해서 투레가 데이비스보다 앞에 있었는데도 제공권에서 밀리는 등 총체적으로 좋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코너킥으로 졌던 풀햄전이 떠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2. 어웨이 팀의 폭풍같은 반격

선제골을 내주고 나자 겨우 정신이 들었는지, 아스날의 움직임이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아데바요르, 쏭이 연속해서 포스트를 맞추면서 경기의 주도권은 완전히 아스날로 넘어가고, "방귀가 잦으면 응가가 나온다"는 PGA 최경주 선수의 우승 소감 마냥 결국은 26분 27분 에보우에와 벤트너가 동점, 역전에 성공합니다. 동점골 장면은 사실 에보우에의 오프사이드였습니다만, 부심이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아스날의 행운이었습니다.


3. 점유율 77-23의 전반 종료.

여세를 몰아 아스날이 거칠게 몰아붙이고 볼튼이 힘겹게 막아내는 사이 전반전이 끝났습니다. 보통 왠만큼 우세한 경기에서도 점유율이 60% 대인데, 무려 77%의 점유율은 이제까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스날의 공격을 막는다고 볼튼이 수비진을 아래로 끌어내리면서 미드필드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것이 역시 첫번째 이유였지요. 두번째 이유는 수비수를 많이 배치하긴 했지만 공격을 완전히 틀어막을 정도로 패널티 에어리어에 빡빡하게 배치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맨마킹을 제대로 붙이지 않고 어정쩡한 지역방어를 펼친 덕에 아스날 선수들이 노마크로 쉽게 쉽게 패스를 받을 수 있게 내버려뒀던 것입니다. 수비의 기본은 1. 패스를 주고 받지 못하게 하고 2. 패스를 주고 받더라도 다음 동작을 방해하는 것인데 볼튼은 이 두가지를 모두 놓쳐버린 거지요.


4. 후반 볼튼의 대공세

하지만 후반 들어 놀란과 가드너를 앞세운 볼튼이 거세게 밀어붙이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다시 볼튼에게로 넘어갑니다. 전반 막판 클리쉬가 부상당하면서 웽어가 사냐를 왼쪽에 배치하고 클리쉬와 교체한 주루를 오른쪽에 배치한 것이 화근이었죠. 양쪽 모두 수비에서는 큰 실책이 없었습니다만 각자 자기 포지션이 아닌 터라 공격력이 완전히 죽어버렸습니다. 좌우 돌파는 모두 풀백들에게 맡기는 것이 아스날 전술의 기본인데 이 기본이 무너지자 공격이 마비되어버렸습니다. 게다가 전반 몰아붙일 때 팀 전체가 오버페이스 한 듯 후반들어 아스날 선수들의 체력이 급격히 소진된 것도 문제였습니다. 집중력이 떨어진 것은 기본이고, 정상적인 패스를 줬는데도 따라가다가 다리 힘이 풀려서 놓치는 경우도 발견되었죠. 결정적으로 화면에 뛰어다니는 선수가 보이지 않을 만큼 활동량이 완전히 바닥이었습니다. 미들에서 패스도 안되고 압박도 안되면서 완전히 미드필드를 내줍니다만, 알무니아와 투레의 활약으로 근근히 버텨냈습니다.


5. No. 14 월콧

까딱하다가는 동점 혹은 역전까지도 바라볼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벵거는 벤트너를 빼고 체력 안배를 위해 아껴두었던 월콧을 투입합니다. 남의 도움  없이 혼자서 볼을 운반할 수 있고, 또 혼자서도 수비를 뚫어낼 수 있는 고속 드리블러가 투입되자 아스날의 공격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결국은 5명을 제치면서 데니우손에게 기가 막힌 어시스트를 제공하면서 볼튼의 기세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볼튼으로서는 바로 그 1분 전, 바즈테가 천금같은 1:1을 놓친 것이 아주 두고두고 후회스러웠을 겁니다. 결국 3-1로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6. 텔레토비 센터백 친구들...

센터백들의 키가 작은 것은 투레-갈라스 라인이 완성된 06/07 시즌부터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긴 합니다만, 우리 벵감독은 당췌 손을 볼 생각을 않고 있습니다. 지난 블랙번 전에서도 산타 크루즈가 제대로 못맞춰서 다행이었지, 제대로 맞았으면 2~3골은 헌납했을 터였죠. 은별이도 183cm, 쏭도 183cm, 센데로스는 이적이 거의 확정적이고(밀란에서 잘하면 밀란 이적할테고, 못하면 돌아와도 주전감이 못되겠죠.) 남은건 192cm 짜리 주루 뿐입니다. 이번에 장기계약을 맺은 것을 보면 그래도 센데보다는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는 것 같긴 한데, 팬으로써 갑갑할 따름입니다.


7. 괜찮은 초반 페이스.

어쨌든 쉽지 않은 리복 스타디움 원정에서 3-1로 승리하고, 첼시와 맨유가 비기면서 현재 5경기 4승 1패 승점 12점으로 선두에 올라섰습니다. 지난 시즌 내내 기복없이 세컨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담당하던 흘렙과 중원의 핵심이었던 플라미니를 동시에 잃고서도 제대로 선수를 보강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괜찮은 성적입니다. 다행히 클리쉬는 타박상이었고, 이번주부터는 쉐필드 유나이티드 - 헐 시티 - 포르투로 이어지는 홈 3연전이기 때문에 일단 칼링컵에 꼬꼬마들 내보내고 부상자들이 돌아오면 페이스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클리쉬의 백업인 은별이도 부상이 잦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클리쉬가 없을 때의 왼쪽 공격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8. 선수 평점.

(1) 알무니아 7/10 - 병주고 약주고.
지난 시즌 괜찮은 활약을 했음에도 알무니아가 아스날에 어울리는 키퍼는 아니라는 평을 듣는 것은, 지지난 시즌까지의 악몽도 악몽이지만 지난 시즌에도 '막을 수 없는 공을 막는' 모습은 보여주지 못한 탓이 크다. 이번 경기에서도 역시 그런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다. 결정적인 슛을 여럿 막아내긴 했지만 또한 펀칭 미스로 결정적인 위기를 부르기도 했다. 본인은 바즈테의 슛을 막아낸 것으로 쌤쌤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건 알무니아가 잘했다기 보다는 바즈테의 실축이라고 봐야 한다.

(2) 사냐 7/10 - 사냐가 왼쪽으로 간 까닭은....
기복없고 단단하며 매섭다. 하지만 그런 사냐도 왼쪽으로 가니까 평범해져버렸다. 벵거는 '왼쪽에서도 뛸 수 있다.'와 '왼쪽에서도 뛰어나다'의 차이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3) 갈라스 6/10 - 언제나처럼.
압도적이진 않았지만 안정적이었다. 경기 초반 남의 페널티 에어리어 오른쪽 구석에서 볼 돌렸던 모습은 좀 무서웠다.

(4) 투레 7/10 - 싸구려 헤딩과 명품 태클
선제골을 내줄 때 케빈 데이비스에게 완전히 눌려버린 것은 뼈아픈 실책. 하지만 후반전 기가 막힌 명품 태클로 팀을 위기에서 잠깐 구해냈다. 뒤에서 태클이 들어가는 순간 얄짤없이 PK 생각했지만 그 상황에서도 볼만 따내는 신기를 보여줬다. 전반 헤딩이 없었다면 평점 8. 후반 그 명품 태클이 없었다면 평점 5였을 지도.

(5) 클리쉬 7/10 - 페르시 보고 놀란 가슴 클리쉬 보고 놀란다.
클리쉬가 빠지자 왼쪽 공격이 무너졌다. 그리고 팀 전체가 밀렸다. 이 이상 그의 비중을 말할 수 있을까? 얘도 왕년에 장기 부상 경력이 있던 터라 발목 잡고 실려나가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6) 파브레가스 8/10 - 진화하는 천재.
실바의 보호 아래에 무럭무럭 자라난 소년은 지난 시즌을 기점으로 별도의 홀딩 미드필더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번 시즌부터는 데니우손의 뒤를 받치면서도 경기를 조율하고 있다. 다음 성장이 기대된다.

(7) 쏭 7/10 - 이런 애를 센터백 백업으로 쓰고 있었으니...
찰튼 임대 가서 에이스를 먹었지만 돌아와서는 벤치 신세. 아프리칸 네이션스 컵에서 베스트 11에도 꼽혔지만 돌아오니 센터백 백업에 89분 투입되던 굳히기 신세. 이번 시즌, 플라미니의 이적으로 미드필드에 자리가 생기면서 간간히 출장하고 있다. 파브레가스나 데니우손 처럼 화려한 맛도 없고 실바같은 탄탄함도 없으며, 플라미니같은 부지런함도 없지만 간간히 패스를 끊고 찔러주는 패스가 좋았다. 이제 아스날에 전문 수비형 미드필더는 필요 없나 보다. 포스트를 맞춘 것은 실수라고 탓할 수 없지만, 돌파하지도 못할 거면서 볼을 질질 끌다가 패스 타이밍 놓치고 역습 타이밍 놓치고 백패스 하는 부분이 자주 보였던 것이 옥의 티.

(8) 데니우손 8/10 - 스탯의 데니우손.
데니우손이 이번 시즌 끔찍했던 경기는 에보우에와 짝을 맞췄던 풀햄전 뿐. 파브레가스 이후로는 파브레가스 * 0.9 정도의 모습을 보이면서 활약하고 있다. 오늘도 파브레가스와 프리롤 비슷하게 움직이면서 괜찮았다. 다만 가끔 뜬금없이 정신줄 놓은 패스 하는 부분은 정말 고쳐야 한다. 아참, 이 경기로 데니우손은 리그 5경기 2골 3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이는 작년 리그 30경기를 뛴 플라미니보다 1골 적고 1어시스트 많은 기록이다. 이미 기록상으로는 데니우손이 플라미니를 완벽하게 대체했다. 기록상으로는 말이다.

(9) 에보우에 8/10 - 그랜드 슬램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난 블랙번전 후반전에 깜짝 왼쪽 윙으로 나왔던 에보우에, 이번엔 아예 선발 왼쪽 윙으로 출전했는데 지난 뉴카슬전 노룩 힐패스보다 더 뜬금없는 골까지 기록했다. 니가 정녕 그 세밀함이 부족하던 에보우에였단 말인가. 툭툭 치면서 페널티 에어리어 안으로 들어와 공격수들에게 넘겨주는 움직임이 매우 좋아졌다. 볼튼전의 모습은 그동안 봐온 경기중 단연 최고. 패싱마스터로서의 재능은 모르겠지만 확실히 멀티플레이어로서의 재능은 클럽 내 탑일 듯.

(10) 아데바요르 7/10 - 결정적인 순간에 자비를.
포스트 맞춘 것도 맞춘 거지만 그 전에도 결정적인 찬스를 날려먹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여전히 폭넓게 움직이면서 수비를 흔들어줬고 동료들이 뛰어들 수 있게 발판을 잘 만들어 줬다. 그놈의 자비만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참, 볼튼전에선 신무기 킬패스도 여럿 보였다.

(11) 벤트너 7/10 - 가자미가 되어라.
득점도 해줬지만 킬패스도 여럿 해줬다. 지난 시즌보다 확실히 나아졌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게 있다면, 팀의 에이스 스트라이커가 페널티 밖에서 땀빼고 있는데 본인은 안에서 있었다는 것. 노가다도 좀 나눠 지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텐데 아쉽다.

(12) 월콧 8/10 - 나 아스날 14번이야!
지난 시즌까지 봐온 월콧은 앞에 공간이 있어야 힘을 발휘하는 타입이었다. 발은 빠르지만 그 속도를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해 쫓아오는 수비를 뿌리칠 순 있어도 앞에 있는 수비를 벗겨내긴 힘들어보였다. 하지만 볼튼전에선 5명의 수비수를 농락하면서 그림같은 어시스트를 만들어냈다. 지난 뉴카슬전 벨라가 중앙에서 드리블 하는 거 보고 월콧도 저거 좀 배웠으면 했는데 그대로 완수해냈다. 경기가 안풀릴 때 생각 나는 사람. 그래서 불러냈더니 한건 해주는 사람. 과연 아스날 14번이었다.


by 고금아 | 2008/09/23 02:29 | 경기 리뷰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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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64242 at 2008/09/27 02:42
잘 봤습니다~
역시 비평가들의 조롱섞인 말들을 뒤로하고 초반기 선두를 질주하는 아스날의 모습에 흐뭇하네요.. 이 기세가 작년처럼 꺾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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