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6일 맨유-아스날 (FA컵) 관전평

0. 쉽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쉽지 않을 줄은 알았습니다. 풀 전력으로 맞붙어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올드 트래포드 원정, 무려 14명을 부상자 명단에 올리면서 선발 라인업 짜기도 힘들어서 일단 다 데려간 뒤 상황 봐서 그나마 덜아픈 애들 내보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죠.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대패할 줄은 몰랐습니다. 암만 상태가 안좋아도 그래도 명색이 라이벌인데, 이쪽은 최근에 제대로 분위기 탔고 저쪽은 1무 1패로 분위기 안좋았는데 말입니다.


1. 아스날 라인업

---------에두아르두----------벤트너-----------
----------------------------------------------
흘렙 ------ 실바 ----- 파브레가스 ------ 에보우에
-----------------------------------------------
트라오레 ------ 갈라스 ------- 투레 ------ 호이트
-----------------------------------------------
----------------------레만---------------------

벤치 : 파비앙스키, 아데바요르, 플라미니, 클리쉬, 센데로스

좌 트라오레 우 호이트 보는 순간 모든 욕심을 버리고 중계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칼링컵에서도 뻥뻥 뚫리는 자동문 듀오인데 하물며 상대는 맨유. 이미 경기는 끝난거나 다름없죠. 월콧이 멀쩡했다면 오른쪽을 에보우에로 막을 수 있었습니다. 센데로스나 쏭만 멀쩡했더라도, 하다못해 데니우손이나 디아비만 있었더라도 실바를 중앙 수비로 막아내고 왼쪽을 갈라스로 메울 수 있었죠. 허나 센데로스 쏭 데니우손 디아비 모두 부상. 벤치 멤버도 전원 부상자들. 게임은 그냥 포기하고 부상 없이 경고 / 퇴장 없이 교체 없이 끝나기만을 빌었습니다. 하지만 축구의 신은 그런 바램조차도 들어주질 않더군요.


2. 맨유 라인업

--------------루니-----------
나니-----------------안데르손------------박지성
--------------캐릭----------플래쳐------------
-----------------------------------------------
에브라------퍼디난드--------비디치-------브라운
-----------------------------------------------
---------------------반데사르------------------

벤치 : 쿠쉬착, 스콜스, 사하, 오셔, 테베즈

질 수 없는 라이벌 전이라고는 하지만 홈그라운드에 상대는 라인업 조차 짜기 힘든 상황, 퍼거슨은 호날두와 하그리브스를 완전히 제외하고 스콜스와 테베즈를 벤치에 앉히면서 여유있게 선발진을 구성합니다. 클리쉬와 사냐가 동시에 결장이 예고된 상황에서 호날두를 투입했다면 3/4 이상 승리를 예상할 수 있었겠지만 역시 바로 이어질 챔피언스리그 경기에 대해서도 안배를 해야겠죠.


3. 클리쉬-사냐 >>>> 클리쉬-에보우에 >>>> 넘사벽 >>>> 트라오레-호이트

트라오레-호이트 라인과 클리쉬-사냐 라인의 가장 큰 차이점은 공수에서의 안정감입니다. 넷 모두 스피드라면 둘째가라면 서럽고 칼링컵 보면 트라오레-호이트 라인도 공격력이 좋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수비력이죠. 일단 사냐는 맨마킹과 지역수비 모두 훌륭하고, 클리쉬도 가끔 오프사이드 라인을 잘 못잡긴 하지만 맨마킹에서 먹어줍니다. EPL에서 호날두를 버로우 태울 수 있는 몇 안되는 수비수죠. 에보우에도 맨마킹은 괜찮습니다.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않는게 문제죠. 트라오레-호이트요? 맨마킹도, 지역 수비도 모두 시원찮습니다. 특히 지난 토트넘전에서도 보셨겠지만, 측면에서 상대 선수가 돌아들어가면 아예 마킹 상대를 못잡아서 허우적대죠. 오늘도 트라오레, 호이트 할 것 없이 사정없이 뚫렸습니다. 트라오레 쪽이 집중적으로 뚫리긴 했습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왼쪽이 더 약하니까 더 후벼판거고, 호이트도 뚫린 확률로 따지면 트라오레 못지 않았어요. 맨유 공격수들이 단신이라고는 하지만 워낙에 편안한 상황에서 질좋은 크로스가 올라오니 어떻게 손 쓸 틈도 없이 머리가 꽂히더군요. 오늘 먹은 4골 중 세골이 헤딩이었습니다.


4. 트라오레, 플래쳐를 베컴으로 만들어주다.

포스트 베컴이 될 거라는 기대 만큼 성장해주지 못하던 플래쳐, 오늘 아주 제대로 베컴신이 강림했습니다. 아주 트라오레를 갖고 놀더군요. 중계에서까지 '농락' 이라는 단어를 쓸 정도였습니다. 플래쳐가 발이 빠른 것도 아니고, 개인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트라오레 정말 속절없이 무너지더군요. 클리쉬가 그 나이 때 플래쳐를 꽁꽁 틀어막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나오는 것은 눈물 뿐입니다.


5. 오십보 백보 호이트.

뚫린 횟수 만으로 따지자면 트라오레가 구멍이었지만 뚫린 '질'로 따지자면 호이트가 더 심했습니다. 나니가 기록한 2 어시스트가 모두 오른쪽에서 나왔죠. 요즘 데발신 몸개그가 잠잠하니 오늘은 간단한 무브 & 스톱 만으로도 라인 밖으로 날아가버리는 몸개그를 선사하더군요. 트라오레는 그나마 어리기라도 하지만 84년생인 호이트는 벌써 스물 넷입니다. 이만하면 슬슬 놓아보내줄 때도 되지 않았나 싶네요.


6. 근성 뿐이었던 센터백들.

트라오레와 호이트는 세금이었다고 칩시다. 어차피 걔네들 어리고 경험도 없고 그정도 뚫릴 거라고는 생각 했어요. 문제는 베테랑인 센터백들도 허우적 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는 겁니다. 투레 - 갈라스 라인은 예전에도 공중 볼에 취약하긴 했는데 오늘도 코너킥을 제대로 걷어내지 못해 첫골의 빌미를 제공했고, 투레는 오프사이드 트랩 여러번 무너졌죠.  갈주장 초반부터 볼처리 불안불안 하더니 플래쳐에게 헤딩골 헌납했구요.

그나마 갈라스 투레가 트라오레 호이트 보다 나았던 것이 있었다면 바로 근성이었습니다. 평소에도 심심하면 공격 가담하던 갈주장은 오늘 트라오레가 올라가지 않자 아예 자기가 볼 몰고 들어가서 페널티 에어리어 옆에서 크로스를 올렸고, 투레는 후반전 센데로스 투입하면서 3백으로 바뀌자 가운데 서서는 리베로마냥 공격시에 페널티 에어리어 안까지 뛰어들었죠. 그런 근성이라도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근성 뿐이었던게 가슴아프지만요.


7. 미드필드의 동반붕괴

미드필드진은... 뭐라고 평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일단 평소의 패스웍은 커녕, 하프라인 넘기 조차 버거울 정도로 미들진의 경기력은 최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미들진의 책임으로 봐야할지는 의문이 생깁니다. 원래 아스날 패스웍의 핵심은 좌우 풀백들의 활발한 공격가담입니다. 측면 미드필더들이 중앙 쪽으로 빠져주면 풀백들이 올라오면서 순간적으로 수적 우위를 만들어서 공격을 풀어나가는 것이 아스날이에요. 그런데 오늘 시합 같은 경우는 풀백들이 공만 왔다 하면 어서옵쇼 하면서 길을 열어주니 측면 미드필더들이 중앙으로 빠지기는 커녕 사이드 수비하기에도 바빴죠. 작년 에코토만 죽어라 후벼파던 아스날 처럼 맨유가 트라오레를 집중적으로 공략한 것도, 에보우에보다는 흘렙이 더 공격적으로 움직였던 탓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흘렙 탓하기도 뭐한게 그나마 흘렙 없었으면 공격 비스므리한 것도 시도하지 못했을 겁니다.


8. 침묵한 공격수들.

좌 흘렙 우 에보우에는 트라오레-호이트 뒤 닦아주느라 바쁘죠, 실바 형님은 아무래도 공격에 젬병이죠. 파브레가스가 패스를 줄만한 곳은 에두아르두와 벤트너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벤트너는 퍼디난드한테 꽁꽁 묶여서 보이질 않았죠. 데발신이었다면 미드필드까지 폭넓게 움직이면서 미드필드 싸움에도 가담해주고 수비도 끌어내주고 패스도 뿌려줬을텐데 데발신은 데발신, 벤트너는 벤트너. 가끔 내려와서 볼을 받은 뒤에도 데발신이었다면 그대로 치고 나갔을법한 상황에서도 맥없는 백패스로 오히려 공격 템포만 늦췄습니다.

폭 넓게 움직여준 것은 에두아르두였지만, 모두가 아다시피 페널티 에어리어 밖의 에두아르두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지요. 평소 같았으면 왼쪽으로 주고 중앙으로 돌아들어갈만한 상황도 있었지만, 평소와 달리 왼쪽에서 받을만한 사람이 없었구요. 로사-플라미니-파브레가스-흘렙의 베스트 멤버로 지원해줘도 골 넣기 만만찮은 맨유 포백 상대로 그만하면 분전했다고 봅니다.


9. 승부에 쐐기를 박은 에보우에의 곧휴킥

측면이 허물어지면서 전반전에만 3골을 허용, 승부는 이미 대기권을 벗어나 안드로메다를 향하는 시점에서 에보우에가 공중볼을 경합하는 과정에서 레드 카드를 받습니다. 둘이 엉켜 넘어지는 폼이 크긴 했지만 레드를 줄만한 상황은 아니었죠. 하지만 느린 화면으로 다시 보니... 에보우에가 점프하면서 에브라의 곧휴에 킥을 하더군요. 다행히 빗겨 맞았는지 에브라는 타격이 없었습니다만 에보우에는 얄짤없이 레드. 최소 3경기 출장 정지로 네이션스컵 휴가를 보장받았습니다. 플라미니를 왼쪽 백으로 돌릴 수도 없고, 에보우에를 오른쪽 백으로 앉히면서 사냐를 왼쪽으로 돌릴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클리쉬가 회복되지 않으면 트라오레나 호이트 둘 중 하나는 계속 보게 됩니다.


10. 유일하게 제 몫을 해준 레만

알무니아의 부상 및 질병으로 최근 선발 출장중이기는 하지만 딱히 기량을 보여줄만한 건덕지가 없었던 레만, 이번 경기에서 아주 제대로 날을 잡았습니다. 4골이나 먹긴 했지만 키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골들이었고, 오히려 1:1 상황에서 여러번 골을 막아내면서 아스날 선수들 중 유일하게 제 몫을 다 해줬습니다. 그래뵈도 독일 국대 주전 골키퍼, 아직 죽지 않았더군요.



11. 명불허전 루니

루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라인을 컨트롤 할 센데로스도 없고, 좌우 풀백들이 자동문이라고 하지만 오늘 루니 여러번 오프사이드 트랩을 무너뜨리면서 잘 해줬습니다. 레만의 선방이 없었으면 해트트릭도 기록했을지 모릅니다. 맨유가 어째서 호날두 없이는 이길 수 있어도 루니 없이는 이기지 못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더군요. 몸빵 좋고 빠르고 시야 넓고 센스 있고......


12. 맨유 꼬꼬마 콤비 - 나니와 안데르손.

나니와 안데르손 모두 잘 해줬습니다. 제가 보기엔 나니 보다는 안데르손이 움직임이 더 좋았습니다. 두세명이 둘러싸기 전에는 볼을 빼앗기지 않았고, 불필요하게 볼을 끌지 않으면서 필요할 때 치고 나가고 적절할 때 내주는 드리블 패스 좋았죠. 하지만 결국 스탯은 나니가 다 찍어가는군요. 흔히 아스날을 2~3년 뒤가 더 무서운 팀이라지만 얘네들 보면 맨유도 만만치않아요.


13. 자신감이 부족했던 박지성

오늘 박지성의 플레이는 '자신감 부족' 이 한마디로 모두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반 초반 발만 대면 들어가는 크로스 놓친 것은 사실 발 대기 직전까지 간 것 만으로도 대단했어요. 그 장면 나오기 직전에 오른쪽으로 볼 빼주고 곧바로 중앙으로 쇄도한 것이었거든요. 후반전 트래핑 뜨는 바람에 찬스 놓친 것도 넘어갈 수 있습니다. 데발신이 그런 찬스 놓친게 한두번입니까. 하지만 트라오레와 호이트를 앞에 두고도 과감하게 돌파 들어가지 못한 것은 비판받을만 하다고 봅니다. 막힐 때 막히더라도 시도는 했어야죠. 게다가 상대는 플래쳐도 갖고 놀던 트라오레란 말입니다. 후반에는 앞에 아무도 없고 텅 비었는데에도 슛 하지 않고 옆으로 돌리다가 찬스 날려먹었죠. 수비 가담 좋고 활동량 많았습니다만, 이렇게 잘 풀린 날이 아니면 또 언제 과감하게 놀아보겠습니까. 나니 안데르손 밀어내려면 꾸준함이 아니라 임팩트가 필요해요.


14. 경기 총평

좌우 풀백은 어서옵셔, 센터백들은 우왕좌왕, 측면 미드필더들은 풀백 지원하느라 헐레벌떡, 중앙 미들은 패스 줄 곳이 없어 허겁지겁, 공격수들은 고립무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4점만 주고 끝난게 천만 다행일 정도로 최악인 경기였습니다. 차라리 토트넘과의 칼링컵 2차전이 이 경기 보다는 나았을 정도루요.

변명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스쿼드 얇은게 무슨 자랑입니까. 아무리 줄부상이라지만 트라오레 호이트는 팀 내 넘버2 풀백들입니다. 넘버2 까지 다 부상 당해서 유스 애들을 올렸다면 모를까, 넘버2가 이렇게 뚫린다는 것은 부상신 이전에 스쿼드 문제라고 봐야죠.

왕창 깨졌으면 정신력이라도 보여야 할텐데, 오늘은 그 정신력 마저도 보이지 못했습니다. 오프사이드 뚫렸으면 악착같이 쫓아가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할텐데 그저 넋놓고 바라보고있질 않나, 심판이 휘슬 불지도 않았는데 지들 멋대로 반칙이랍시고 멈춰서질 않나, 게임 안풀린다고 멀쩡한 남의 곧휴 걷어차서 퇴장당하질 않나. 시합에서 깨질 줄은 알았지만 정신력조차도 망가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나마 후반 시작하자마자 에보우에 퇴장당하고 나니 정신 무장이 되었는지 경기력이 조금 살더군요. 맨유가 조금 느슨해진 것도 있습니다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부상자들을 교체 투입했음에도 별다른 부상이 없었던 것 정도입니다. 막판에 실바가 다리를 절긴 했는데 어떻게 될른지 모르겠네요. 기왕이면 후반전에 경험을 쌓는 차원에서 레만 대신 파비앙스키를 넣었어도 괜찮았을텐데 싶기도 하구요. 밀란전 생각하면 한숨 밖에 안나오네요.

by 고금아 | 2008/02/17 06:29 | 경기 리뷰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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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Dataman at 2008/02/17 08:08
마치 지난주 더비 이후 유나이티드 팬이 쓴 리뷰같습니다.

축구라는 게 그런 것인지도.
Commented by 벚꽃쥬스 at 2008/02/17 09:51
에부에 퇴장당하고낫서 티비 껐습니다.

양 풀백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제대로 털리네요. 남아있는지도 몰랐던 플레쳐는 배컴되었고, 나니는 스텟 다 찍고, 안데르송은 덩치에 비해 밸런스가 되게 좋네요. 의외로 수비력도 있고.

밀란전만 어찌 잘 넘어갔으면 합니다.
Commented by 鷄르베로스 at 2008/02/17 11:14
오늘 플래쳐 마치 커세어神의 가호를 받는 것 같더군요 --;
역시 쫄(소형유닛) 잡는데는 다크템플러가 최고라는 ...
그나저나
지성이는 ... 부상전보다 순간민첩성이 많이 떨어지는 모습이라 좀 안타깝더군요.

Commented by chungsuk at 2008/02/17 11:33
밀란도 오늘 파르마전 생각하면 답이 안나오죠;; 이러다가 막장 더비 되는 건 아닌가 -,-
Commented by 백암 at 2008/02/17 14:30
윗분공감.....뭐 답이 없군요,,,
Commented by 히치하이커 at 2008/02/17 21:49
리그나 챔스가 가장 고픈데 FA컵이고, 부상자는 넘쳐나고, 올드트래포드 원정이라 맘을 비우고 봤지만 이건 뭐...
보다가 에보우에 퇴장 당하고 껐습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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